찬미예수님,

 

한 주간 주님과 함께 좋은 날 잘 지내셨습니까?

 

무더위에 몸이 힘들고 지칠 때입니다.  그래도 마음만은 늘 주님에 대한 사랑의 열정을 간직하는 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어느 배움이 부족한 한 사람이 당대의 유명한 신학자를 찾아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저처럼 배움도, 지식도 없는 가련한 사람이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그 때 그 신학자는 웃음을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당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오직 구원을 원하는 것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배움 많은 율법교사가 자신의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질문, 이에 대한 답을 갖고 있지 못한다면 자기의 배움도 자기의 삶도 무의미해지는 것이지요.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 참으로 많습니다. 넓은 길, 좁은 길, 오솔길, 큰 길, 그러한 여러가지 길 중에서도 사람이라면  제일 귀하게 여기면서 마음에 담고 가야 할 길이 있는데,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구원의 길이 무엇인가를, 그 대답을 갖고 있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참으로 덧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교사도 주님 앞에 와서 질문을 합니다.  이와 비슷한 질문이 마태오 복음에서는 "율법으로 가장 큰 죄명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주님 앞에서 질문합니다.  오늘 질문 내용이 똑같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종종 "내가 정말 구원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내가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정말 옳은 일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인가?  이러한 생각들이 언뜻 여러분들 마음 속에 일어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답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고, 우리는 대답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내 마음 안에서 정말 구원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라는 마음이 이미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있다면 그것에 대한 답을 여러분들이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왜 그 질문이 들었겠습니까?  내가 정말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 것인가?  내가 예수님과 하느님을 정말 제대로 섬기고 있는 것인가? 예수님 믿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부족한 마음에서 그러한 의문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신학자가 대답한 그 대답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오직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내가 정말 간절하게 구원을 바라는 주인이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 첫째 독서에서 모세는 하느님 계명에 대해서 이 신학자의 대답과 비슷한 대답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마땅하게 하느님이 가르쳐 주신 것을 잘 지켜야 하는데, 다시 말하면 계명을 잘 지켜야 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계명을 알기 위해서 하늘로 올라가야 할 일도 없고 바다를 건너가야 할 일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미 하느님의 가르침은 우리 마음 속에 있다"라고 얘기합니다.  "네 마음을 잘 살펴서 네 마음이 원하는 가장 좋은 그 일을 행하면 된다"라는 것입니다. 실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던 적던, 남자던 여자던, 가난하던 부자던,  지식이 많던, 적던 누구나 다 하느님 계명이 지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나는 잘 모른다"라는 것부터 미리 전제하여 버립니다.

 

여전히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좋은 생각들, 그 좋은 일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잊지 말고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중에 하나는, 그 하느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하느님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명을 지킬 때 우리가 착각하는 것중에 하나는 "내가 이 계명을 지키면 하느님은 편안해 지시고, 내가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하느님이 진노하셔서 늘 하느님이 불편해 지신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살인죄를 저지른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상처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잘못 속에서 극복해 낼 수 있는가를 평가할 때 하느님의 상심을 우리가 얘기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렸다, 하느님께서 진노하신다, 하느님께서 슬퍼하신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어떠한 부분 때문에 하느님에게 무엇인가가 덧붙여지고 하느님께서 갖고 계신 완전 속에서 어떤 것이 빠져나가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많은 길들 가운데 구원에 이르는 그 길은 "하느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이 사랑의 말씀, 이것을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이라고 하는 이름 석자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이 얘기를 다 한번 쯤은 들어봤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이렇게 단순합니다.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가장 바른 소리, 옳은 말, 참 말은 이렇게 단순합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복잡한 것은 사람의 머리가 복잡한 것입니다.  내가 그 모두를 사랑하면 되는데 여기서 왜 복잡한 것을 따지고 있습니까?  질문을 하면 할수록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여러분들 머리로 다 이해하면서 살아가려고 한다면 하느님 나라에 가서야 가능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랑의 모든 것들은 너무나 깊고 넓어서 아주 어린 아이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공부를 평생한 그 유명한 철학자들 신학자들도 그 진위를 다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신명기, 구약에서부터 그 얘기가 전해졌습니다.  오늘 그 율법교사가 대답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이 가르쳐 준 얘기가 아닙니다. 이미 하느님께서 구약시대부터 예언자들을 통해서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길을 걸어가야만 하늘에 이를 수 있다.  너희들이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라고 해서 전해진 율법들입니다.  내 마음을 다하고 내 힘을 다하고,  내 정신을 다하고 내 목숨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한다.  이것을 우리는 예수님이 오셔서 새롭게 준 계명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이 보이지 않으니까 이러한 마음과 정성으로 하느님 앞에 기도하고, 어떤 시행령을 바치고 지켜야 도리를 하면 될 것 같은데, 문제는 이웃사랑이 문제입니다.  제일 먼저 걸리는 게 있습니다.  대체 이웃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이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내 이웃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라고 질문한 것은, 여기서는 예수님을 떠보기 위해서라고 나와 있지만 사실은 이것은 율법교사들, 율법 선생이라고 한다면 이건 굉장히 큰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람마다 제각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당시까지 내려왔던 결론은 '유대사람들이 바로 네 이웃이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은 바로 이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을 힘들게 하거나 이스라엘을 침략하거나 이스라엘의 미움을 받는 그러한 족속들, 그들을 미워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로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을 좋아하면 같이 부정타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2차 대전중에 나치에 저항하다가 옥중에서 사망한 유명한 독일 목사님이 계시죠.  디크리히 본회퍼라는 독일 목사님이 여러가지 귀한 말씀들을 남겼는데, 이웃사랑에 대해 이러한 얘기를 남기셨습니다.  "우리는 한가하게 자리에 앉아서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 아닌지 따질 시간이 없습니다. 다만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이웃에게 이웃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웃이라고 한다면 나와 같은 수준에 있던지 나와 같은 문화를 향유하고 있던지, 아니면 피를 같이 나누었던지, 지역으로 같이 연결되었던지, 학교를 같이 나왔던지,  뭔가 이렇게 인연의 끈이 닿아있는 사람들이 이웃이고 그 이외에는 타인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나 빼면 다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좋은 이웃들을 많이 두고 계시지요?  아니, 오늘 말씀에 의하면 내가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는지를 돌아봤을 때 내가 좋은 이웃으로 있는 사람이 바로 구원의 길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좋은 이웃을 많이 두고 있는 사람도 그 이웃들의 도움으로 구원의 길로 나갈 수 있겠지만 그러한 이웃들의 도움만 받고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이웃입니다. 내가 그런 좋은 이웃들을 만나서 도움을 받고 있다면 나 또한 역시 마찬가지로 그러한 이웃들의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이웃들 중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을 갑자기 이웃이라고 하니까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하느님을  만나기 전까지 우리 자신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유아세례 받았을 때 하느님을 만난 게 아니죠.  그 때는 하느님의 사랑을 내가 못알아들었습니다.

 

내가 철이 들고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들었을 때 하느님이 이렇게 나에게 다가오셨구나 하고 깨닫게 되지요. 바로 그 순간 한번 돌아보세요.  그 전까지 나의 모습은 어땠는가를.  우리는 죄악 속에 있었고, 병들고 죽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은 그 때 우리의 이웃으로 다가오셨던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을 사마리아 사람 대하듯이,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대하듯이 그렇게 원수같이 여겼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나에게 좋은 이웃으로 다가오셨습니다.  나의 일그러진 모습을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왔는지를 묻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목숨까지 내주시면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렇게 새 사람이 되고 새 생명을 얻었으니까 그 받은 사랑을 잊지 말고 너도 가서 이제 그런 길을 택하라"라는 것입니다.  그게 너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네 이웃도 살고, 우리가 모두가 함게 사는 길이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 하느님 앞에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고자 한다면 오늘의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도 가서 그 일을 행하라"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라는 것입니다. 

 

남이 먼저 네 이웃이 되어주기를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이웃이 되어주어야 하는 그 모습이 바로 이 세상을 이기는 힘입니다.  

 

횡적인 이웃사랑.  여러분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횡과 종이, 가로와 세로가 만나는  자리가 바로 사랑이 완성되는 자리입니다. 내가 하느님에게 받는 사랑만 받고 이웃사랑 없이 십자가가 완성될 수가 없습니다.  횡적인 이웃사랑이 있을 때 종적인 하느님 사랑의 그 십자가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살아 생전에 이런 말씀을 남겨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우리는 무관심하게 지나쳐서는 안됩니다,  그 사람 곁에 멈추어 설 수 있게 하십시오.  이 멈추어 서는 것은 내적인 마음가짐의 개방입니다."  이렇게 멈추어 선 다는 것.  바로 이 모습을 통해서 프란치스코 성인도 태어났고, 마더 데레사 수녀님도 이렇게 복자의 길까지 올라갔습니다,  그 이외의 모든 성인 성녀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의 일생이 이 멈추어 섬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이웃은 처음부터 우리 곁에 있어왔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그 수많은 계명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이웃을 바라보는 어느 지점에서 멈추어 설 수 있을 때, 그 계명들은 우리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계명을 일일히 기억하면서 지켜내려고 노력하지 마십시오,  불가능합니다. 그 계명을 지키지 못했다고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 이웃으로 다가오신 우리 주님을 진정 마음 깊이 모시고 이제 우리도 누군가의 이웃이 되기 위해서 멈춰설 수 있는 마음의 개방을 이루어갑시다. 

 

오늘 다시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이 전해 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렇게 하면 너의 구원이 확실히 이루어지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