쾰른 한인 성당 사순 강론 1. 13. 03. 2011.

1.     성경, 무엇을 읽어야 하나?


1.1.          이끔말


지난 성탄 미사후에, 본당 신부님과 신자분들의 성경 공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있는 저에게는 참으로 관심이 가는 주제였고, 여기서 공부하는 목적은 바로 교회 공동체에 봉사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기에, 다른 신부님들보다 조금 더 말을 많이하게 되었고, 살짝 술도 한 잔 마신 상황에서, 덜컥! 신부님의 청에 대해서 겁도없이 „Ja!“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어느 덧 시간이 흘러, 그 날이 왔습니다. 두 주에 걸친 시간 동안에, 성경에 대해서 여러분들과 함께 나눈다는 사실이 참으로 쉽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주제에 대해서 묵상을 하고, 기도를 하면서, 오늘과 다음 주일 두 번에 걸쳐서, „성경 무엇을 읽어야 하나?“ „성경, 어떻게 읽어야 하나?“라는 주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은, 이 앞에 서 있는 제가 주옥 같은 말마디로 여러분들을 사로잡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러한 능력도 제게는 없습니다. 이 시간의 주인공은 제가 아닌, 여러분, 바로 성경을 읽고자 노력하는 여러분들이십니다. 그러니, 그 주인공이 제대로 마음가짐을 먹지 않는다고 하면, 그 무대는 좋은 무대로 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시간의 주인공은, 때로는 읽지않아서 먼지가 쌓여가는 성경책에게 미안하고 죄짓는 마음이 있으셨던 분들,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고, 재미없는 성경책으로 접하셨던 분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발의 등불로 삼아서 지금까지 신앙 생활을 해 오셨던 모든 분들께서, 바로 이 시간의 주인공이며 바로 그러한 주인공이신 여러분들과 함께 그 여정을 떠나서 성경을 읽어나가시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시작하고자 합니다.

 

1.2.          성경이란 무엇인가?

여러분들께서는 성경이란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무엇을 읽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앞서서, 성경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이라는 단어를 처음들으셨을 때,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하느님의 말씀. 신약과 구약. 46권과 27. 하느님의 말씀이 하느님의 영의 이끄심을 통해서, 인간에 의해서 쓰여지 책. 인류의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 셀러. 매일미사를 3년간 매일 읽으면 거의 모든 부분을 한 번 씩 읽을 수 있는 책.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절대적인 말씀이요,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항상 취약하고 약점으로만 작용하는 책 등등. 성경에 대한 우리 신자분들 개개인의 생각과 정의들이 각양각색으로 떠오를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생각하신 그 모든 것들이 모두 맞는 답입니다. 성경이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지만, 사람의 손에 의해서, 사람의 언어로 쓰여졌기에, 사람의 생각, 사고로 읽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역, 하느님의 영역의 이야기를 사람의 언어로, 눈과 귀로 읽고 들을 수 있도록 기록된 책. 그것이 바로 성경인 것입니다.

1.3.          성경은 언제, 왜 쓰여졌는가?

성경이 무엇이다 라는 질문에 어느 정도 답이 되었다면, 우리는 다시, 성경은 언제, 왜 쓰여졌는지에 대해서 물어야 합니다. 성경은 왜 쓰여졌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그 쓰여진 시기는 언제이겠습니까? 이 두 가지 질문은 우리에게 성경의 본질에 더욱 다가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성경의 가장 첫 번째 나오는 책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께서는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바로 창세기입니다. 창세기라는 한자말을 우리말로 풀어보면, 세상을 창조한 이야기 혹은 세상 창조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세, 세상의 창조에, 첫 시작에 눈을 고정 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또한 의문이 들기도합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과연,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장면을 옆에서 보면서, 직접 기술하였을까요? 적어도 하느님께서 세상을 엿새 동안 창조하셨고, 창조물 가운데에서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인간이 그것을 기술할 수 있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였을 때에, 우리는 그것이 모순임을 알게 됩니다.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거짓, 뻥인가? 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은 성경이 단순하게 역사적 사실의 기술이 아닌, 신앙의 책, 믿음에 대한 인간의 체험을 정리하여 놓은 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역사적인 내용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일련의 역사서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지닌 본질입니다. 그렇다면, ?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어느 정도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역사적 체험을 자신들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함과 동시에, 과거 선조들로부터 전해져 온 것을 신앙의 눈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한 것. 그것의 결정체가 바로 성경인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구약 성경 안에서, 우리는 46권의 방대한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두 개의 큰 축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한 탈출, 출애굽사건이 첫 번째요, 이스라엘 왕국 (남 유다)이 바빌론 왕국에 의해서, 왕조가 몰락하고, 유배를 간, 바빌론 유배 사건이 그 두 개의 큰 축입니다.

이집트 탈출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의 소수 민족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을 통해서 약속하셨던 하느님 백성으로 자리 잡아가는 긴 여정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의 원체험이었고, 그것이 후손들에게 입으로, 입으로 전승이 되어집니다.

그렇게 전승되어오던 것들은 두 번째 축인 바빌론 유배 사건을 통해서, 기술이 되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아, 이방 민족에게 짓밣히는 치욕을 겪게 됩니다. 그 치욕은 단순하게 치욕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이끌어줍니다. 과연 하느님께 선택되었던 이 민족이 어떻게 하여서,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묻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근원으로, 하느님께로 돌아가고자, 그들은 자신들이 전승받았던 신앙의 이야기, 신앙의 고백을 기록하고, 하느님께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 시작이 바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이야기와 첫 인간,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로 그 첫 자리를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좌절 속에서, 실망하고, 무릎을 끓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순간에 하느님께 다시 다가가고자 노력하였으며, 하느님께 매달리고, 그 신앙을 찾고자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정체가 바로 성경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하느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노력이 바로 성경을 기술하게 만들었으며, 그러한 노력은 조금씩 결실을 보게 되어서,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구약, 첫 번째 성경을 만들어 냅니다.

구약 성경은 이러한 배경과 바탕 속에서 탄생하였다면, 신약 성경은 어떠합니까? 구약과는 달리 신약에서는 하나의 중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신약 성경의 27권의 책 속에서 중심에 서 있으며, 모든 내용들을 그 분을 향하고 있습니다. 신약도 구약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함께했던 제자들, 혹은 복음서의 저자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바로 옆에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이집트 탈출과 바빌론 유배라는 두 개의 축을 통해서,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신약에도 축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축입니다. 그 축은 바로 예수 부활 사건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잊고서 읽어나간다면, 올바른 이해에 도달 할 수 없습니다. 신약 성경이 쓰여진 시기가 모두 차이가 있습니다. 기원후 50년부터 150년사이를 그 시기로 봅니다. 그렇다면, 에수님께서 돌아가신 해를 대략 30년 정도로 본다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 20년의 시간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 부활 사건 이후에 성경이 쓰여졌다는 것이고, 그 부활의 눈으로 예수님의 탄생부터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성경이 기록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부활의 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수난과 십자가를 통하여 죽음이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요, 죽어야, 다시 살아 날 수 있다는, 부활 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신약 성경, 특히 복음서는 이러한 사건을 예수님 옆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생생하게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체험은 체험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신앙 고백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다른 신약의 서간문들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1.4.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지금까지는 개론적인 이야기들을 여러분과 나누었다면, 이제 본격적인 내용을 다뤄보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성경의 본질들을 생각하면서, 과연 그럼, 무엇을 읽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성경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읽어야 하겠습니까?

이제 주제는 목적어에 해당하며, 오늘 이 시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물론, 앞의 내용들도 중요하지만,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바로 이 부분을 위한 기본이었습니다.

무엇을 읽어야 합니까?

우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서는 무엇을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성경책이 책장에 아니면, 성모상, 또는 요셉 성인 상 옆에 놓여져서는 그 기능을 구실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말씀드리고자 여기 교보재를 갖고 왔습니다. 제 한 손에는 지도가 들려있고, 또 다른 한 손에는 다 아시는, Navigation이 있습니다. 이 지도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읽습니까? 모르는 동네, 낯선 곳에서 우리는 이 지도를 의지하면서, 내가 가고자 하는 곳, 원하는 곳, 목적지를 찾아갑니다. 반대로, Navigation은 우리가 원하는 장소를 입력하여 놓으면, 그 장소에 내가 도달 할 수 있도록 안내해 줍니다. 가만히 가라는 장소로 가라고 하면, 그 목적지에 도달 할 수 있습니다. 설령 길을 잘못 간다고 하여도, 친절하게 돌아가라고 알려줍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러한 Navigation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철저하게 손으로 쓰여지고, Digital이 아닌, 완전한 Analog이기 때문에 먼저 무언가에 의존하기보다, 직접 그 지도를 들고 찾아가야 합니다. 목적지를 향해서. 성경은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쓰여진 이유이고, 존재의 이유인 것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그럼,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지도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찾고, 그 목적지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게 됩니다. 내가 서 있는 거리의 이름,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찾게 됩니다. 그렇게 내 위치를 파악하게 되면, 그 때부터 목적지를 향해 나아갑니다.

성경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성경을 읽으시면서, 여러분들의 자리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잘 이해가 가지 않으시죠? 성경이 왜 쓰여졌는지, 성경에 무엇이 쓰여졌는지에 대한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앞 부분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신앙 고백이요, 자기 반성인 동시에, 하느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작은 몸짓들이 엮어진 책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고백에, 신앙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을 알게되었고, 만났으며,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갔던 것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어디 별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와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 인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 안에는 많은 죄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다윗 임금, 그리고, 오늘 1 독서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원죄이야기, 그리고, 신약에서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와 예수님을 부인했던 초대 교황인 베드로, 심지어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박해했던 사도 바오로의 이야기까지, 무수히 많은 죄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만 구성이 된 것이 아니라, 사람사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왜 거룩한 경전이라는 성경에 이러한 상스럽고, 부정한 이야기들이 나오겠습니까? 그것은 그러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고백하고, 하느님을 체험하였으며,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자녀로 자리잡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그것이 단지 성경의 인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읽는 사람들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라는 것이 아니라, 비록 부족하고, 죄도 많이 짓고, 미워하는 사람들도 많고, 또 힘들게 하는 사람도 많고, 용서 못하는 사람도 많고, 죄라는 죄는 다 지으면서 살아가서, 사는 게 죄인 나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다!! 라는 것을 읽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오늘 독서의 예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1 독서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바로 선악과 이야기 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오늘 독서를 읽으셨습니다. 무엇을 읽으셨습니까? 오늘 독서 말씀 안에서 무엇을 읽어내셨습니까? 독서자께서 읽으실 때, 여러분들도 함께 귀로 듣기도 하고, 매일 미사 책을 함께 읽으셨습니다. 무엇을 읽으셨습니까?

독서에는 하느님, 아담과 하와, 그리고 뱀 한 마리가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야기에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죄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지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신 첫 인간들이 지은 범죄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이제 이 사람들과 여러분의 모습을 비교하여 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계명을 거슬렀던 그 원죄의 순간은 언제였으며, 무엇이었습니까? 인류의 첫 번째 범죄와 견주어서,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른 첫 범죄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범한 첫 번째 잘못, 죄라고 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는 무엇입니까? 내 삶의 자리, 우리의 자리라는 것은 바로 성경의 등장 인물과 나를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원죄를 생각하고 묵상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다시 성경을 읽습니다. 여러분들이 갖고 계신, 길라잡이의 역할을 하고 있는 매일미사책의 해설은 촛점을 유혹과 범죄 이야기에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인이요, 이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유혹을 이겨내자 알려줍니다. 하지만, 그러한 길잡이는 우리의 눈을 무엇인가를 읽어야 하는 우리의 눈을 범죄한 인간의 이야기에만 머물게 합니다. 첫 번째 읽었을 때의 그 인상, 그리고 기억에 남는 내용이 첫 범죄, 첫 죄악이었다면, 이제 눈을 좀더 크게 뜨고 다시 읽어보십시오. 더 중요한 사실을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독서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 하나를 꾸미시어, 당신께서 빚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주 하느님께서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흙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 나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창세 2,7-9).

여기서 우리가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시고, 또한 생명의 나무를 인간이 머무르는 그 동산의 중심에서 자라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중간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인간에게 부여된 계명.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을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되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창세 2,17).

생명으로 중심을 이루던 이야기에 대항 개념이 등장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또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아담과 하와는 간교한 뱀의 유혹에 넘어가 먹게 됩니다. 뱀이 유혹합니다. 직접적으로 먹어라 하면서 유혹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 (창세 3,1)

이에 여자는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며 첫 번째 유혹을 이겨내는 듯 보입니다. 이에 뱀은 다시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래서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 (창세 3,4-6)

첫 인간들의 범죄에 앞서 등장한 유혹의 모습은 직접적이지도, 노골적이지도 않은 유혹입니다. 뱀이 그것을 따 먹어라라고 직접적으로 유혹하지 않습니다. 죄의 경향으로 기울게 만듭니다. 그것이 먹음직스럽고 소담스러워보이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행동은, 행위는 사람이 직접합니다. 선택의 순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에서 하느님의 뜻을 거스릅니다. 아울러, 그 죄악은 혼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나만 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내 가족, 내 형제, 내 이웃에게도 전이가 됩니다. 옮겨집니다. 전염병처럼.   

여기서 의문이 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열매를 따 먹게되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바로 죽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첫 계명을 갖고 거짓말을 하신 것입니까? 물론, 거짓말은 아닙니다. 나중에 죽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죄악은 죽음이 마지막 종착지라는 사실입니다. 생명에서 죽음으로 옮아갑니다. 죄를 지음으로써 도달하는 곳은 바로 죽음입니다. 생명과 정반대인 그것.

아울러 여기서 우리는 오늘 독서에 나오지 않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뱀의 등장 바로 전, 하와의 창조 이후의 짧은 구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창세 2,25).

그리고,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아담과 하와는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러이를 만들어 입었다“ (창세 3,7).

알몸이면서, 알몸인 상태를 부끄러워하지 않은 상황에서 알몸인 것을 알고 옷을 만들어 입게된 상황의 변화. 하느님께서 직접 생명을 불어넣어준 첫 사람들, 생명으로 충만한 생명의 영이 가득한 그 곳에 머물던 그 첫 사람들이 이제 생명의 영역에서 죽음의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죄이다. 그리고, 그 죄는 생명의 영역에 머물게 하여주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영역으로 옮겨가게 한다고 성경은 분명하고 명확하게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여겼을 때 나오는 반응 부끄러움에서 수치스러움으로 넘어가는 그 과정을 성경의 첫 번째 범죄 이야기, 원죄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죄의 작용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우리의 원죄의 상황을 아프지만, 떠올려봅니다. 우리의 원죄의 순간. 그 순간이 우리에게는 어떻게 다가왔습니까? 달콤하고 먹음직스럽게 우리에게 보였습니까? 그리고 누군가가 우리에게 그것을 하라고 종용했습니까? 하느님을 거슬렀던 우리는 우리가 직접 행위의 주체로서 움직였던 것입니다. ! 그리고 나서 우리의 모습은 어떠하였습니까? 당당했습니까? 자랑스러웠습니까?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처음으로 죄를 범하고, 부끄러웠던 그 순간을 기억해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의 원죄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먼 옛날 성경에 나왔던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나의,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이제 ! 자신!“ 입니다. 알몸이면서도 알몸인 상태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나.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거슬렀기에 수치스러움을 느꼈던 나를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 원죄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분명한 내용은 내 자신이 죄를 짓고 난 후에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작용은 생명의 영역에서, 죽음의 영역으로의 이동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말아라라는 직접적인 명령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미 죄의 상태를 경험하고 체험한 사람들이 죄의 영역에 머물러 있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아담과 하와의 첫 범죄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의 상태에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갓난 아기나, 어린 아기는 자신이 발가벗고 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또한 어린 아이는 자신의 숨은 생각을 만들지도 않고, 자신의 생각을 숨기려 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갈수록 점점 숨은 생각이 생기고, 자신의 생각을 숨기려듭니다. 바로 이러한 영역의 움직임이 생명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단계로, 하느님으로부터, 에덴 동산으로부터 벗어나는 여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는 하느님의 생명이 가득찬 생명의 에덴 동산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에서 읽어내야 할, 오늘의 주제인 무엇입니다.

성경을 펴서 우리는 성경의 첫 내용을 읽습니다. 그리고 나의 삶의 흔적들을 읽어냅니다. 그리고, 나서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읽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읽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당연히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들어야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수 천년 전의 등장 인물들의 이야기만, 그들의 삶만을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살고 있는 내 자신의 삶으로 읽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미사 겉표지에 매일미사를 삼 년 동안 매일 읽으면 신구약 성경의 주요 부분을 대부분 읽게 됩니다라고 작년 매일미사 책에는 쓰여 있었습니다. 사실입니다. 전례주기는 삼년으로 돌고, 매일 미사의 독서는 홀수와 짝수해로 이루어져서, 삼년 간 매일 읽으시게 되면, 거의 모든 부분을 읽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창세기의 예를 통해서 보았던 것처럼, 우리에게 오늘 우리의 중심 주제인 성경,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올바른 답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책을 직접 펴서 읽으십시오. 성경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으십시오. 그리고 내 삶을, 우리들의 삶을 읽으십시오. 단순히 활자화 된, 인쇄된 글자만 읽지 마시고, 그 안에 우리 보다 먼저 신앙을 갖고 하느님을 믿고 따르고자 했던 그 여정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체험하였으며, 어떻게 하느님 안에서 좌절하고 등을 돌리면서 살았는지를 읽으십시오. 그리고 나의 삶을, 우리의 삶을 읽어내십시오. 그렇게 읽어낸 우리의 삶의 모습이 하느님 보시기에, 예수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 될 수 있도록 가꾸고 만들어 나가십시오. 그것이 바로 성경을 읽으면서 찾아가야하는 목적이요, 오늘의 중심 주제입니다.

공교롭게도 작년 사순 첫 주일에 저는 여러분 앞에서 화해와 용서라는 주제로 강론을 드렸었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강론 잘 들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재미도없고, 따분하기 그지없는 학생 신부의 강론을 잘 들어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잘 기억을 못하셨습니다. 아마도, 제 강론이 여러분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성경의 말씀도 내 얘기가 되지 않으면, 읽고나서 쉽게 잊어버립니다. 말씀을 살아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간에 지도와 Navigation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성경이라는 지도를 들고 계십니다. Navigation은 찾기 힘드시지만,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본당 신부님이라는 훌륭한 Navigation을 갖고 계십니다. Navigation만을 갖고서 살아가면, 편합니다. 누르기만 하면, 언제나 좋은 말씀이 나옵니다. 하지만, 점점 우리는 Navigation에만 의존하게 됩니다. 우리의 손에 역사와 전통을 충만하게 지닌채 쥐여져있는 지도, 성경은 먼지만 쌓이게 됩니다. 성경 이라는 지도를 자꾸봐야 잘 볼 수 있게 됩니다. 성경에 먼지만 쌓여서 마음을 무겁게 갖지 마시고, 또 읽어야지 하면서, 창세기 1장만 읽다가 덮지 마시고, 그 날의 독서와 복음 말씀부터 읽어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예를 통해서 다음 주일에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구체적인 예를 함께 찾아보고 나누고자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가지 부탁을 드립니다. 다음 주에 성당에 오실 때에는 꼭!! 성경책을 갖고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래야 함께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대한 여정을 함께 생동감 있게 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아무쪼록 우리는 이제 무엇을 읽을 것인가에 대한 맛보기를 하였을 뿐입니다. 오늘 함께 나눈 무엇을 갖고 한 주간 성경을 읽고, 내 삶을 읽고 앞으로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거듭나시는데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쾰른 한인 성당 사순 강론 2. 20.03.2011.

2.     성서, 어떻게 읽어야 하나?

지난 주에는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갖고, 그것에 대한 답을 찾아보았습니다. 기억을 하시는지요? 물론, 지난 주에 함께 하셨던 분들께서는 그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시겠지만, 지난 주에 함께 하지 못했던 신자분들을 위해서, 잠시 아주 살짝만 짚어보고,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그것은 단지 성경에 나와있는 내용만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우리들의 삶의 자리를 읽어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바로 지난 주 독서 말씀이었던 창세기의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 첫 인류의 범죄를 통해서, 내가 하느님의 계명을 거슬렀던 그 첫 자리를 생각하여 보고, 아울러, 지금의 나는, 어디에 서 있는지. 생명의 동산이었던 에덴 동산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기억나시는지요?

지난 주에는 우리가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았다면, 오늘 이 시간에는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갖고 함께 이 시간을 채워나가고자 합니다. 성경,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물론, 잘 읽어야 합니다. 눈을 크게 뜨고, 똑바로 봐야 성경을 올바로 읽을 수 있으며, 아울러, 우리의 삶의 자리 또한 올바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읽는 것이 잘 읽는 것인가? 그것은, 우선, 첫 번째로! 우리의 고정 관념을 지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신앙 생활을 해 오면서, 수없이 들었던 성경 말씀들에 대한 선입견, 고정 관념을 모두 지워야만, 우리는 올바르게 성경을 읽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정 관념, 선입견.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라는 자신감!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성경을 올바르게 읽는데에 도움을 주는 부분보다, 오히려 많은 장애 요소로서 작용합니다.  

2.1.          요셉 이야기 (Gen 37-50)

요셉을 팔아 넘긴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봅니다. 여기에서의 요셉은 성모님의 배필이며, 예수님의 양아버지이신 성요셉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께서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야곱의 가장 사랑하는 여인, 라헬에게서 태어난, 사랑스러운 아들, 요셉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여러분들께서는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요셉에게는 몇 명의 형들이 있었습니까? 바로 10명입니다. 이 열 명의 형들이 요셉을 어떻게 하였습니까? 요셉의 꿈 때문에, 아버지 야곱의 지나친 편애로 인해서, 요셉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 미움이 미움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양 떼에게 풀을 뜯기고 있는 형들을 방문한 요셉을, 죽음 직전에까지 몰고 가는 사건이 생기게 됩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창세기 37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12절부터 시작이 됩니다. 여기서 제가 다시 묻고 싶습니다. 요셉은 죽습니까? 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형들은 요셉을 어떻게 대합니까? 바로 죽이려는 음모에서, 요셉이 입고 있던, 저고리를 벗기고, 잡아서 구덩이에 던집니다 (23-24). 그렇다면, 여기서 결정적 질문을 던집니다. 요셉을 팔아넘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이집트로 팔아넘긴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그냥, 형들이 팔아넘겼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정확하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26-28

그때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 그 아이를 이스마엘 인들에게 팔아 버리고, 우리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자. 그래도 그 아이는 우리 아우고 우리 살붙이가 아니냐?“ 그러자 형제들은 그의 말을 듣기로 하였다. 그때에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가다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내었다. 그들은 요셉을 이스마엘인들에게 은전 스무 닢에 팔아넘겼다. 이들이 요셉을 이집트로 데리고 갔다.


자 어떻습니까? 누가 요셉을 팔았습니까? 형들입니까? 여러분들께서 읽으신 것처럼, 요셉의 형들이 팔아넘긴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갑자기 등장한 미디안 상인들이 요셉을 이스마엘인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그리고, 이 이스마엘인들이 요셉을 이집트로 데리고 갔습니다. 성경의 본문은 우리에게 정확하게 누가 요셉을 팔았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36절의 말씀입니다.

.

36

한편 미디안인들이집트로 가서 파라오의 내신으로 경호대장인 포티파르에게 그를 팔아넘겼다.


똑같은 37장 안에서, 이렇게 모순되는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이스마엘인들에게 팔았다고 하더니, 이제는 다시 이집트의 파라오의 경호대장 포티파르에게 팔아넘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39 1절을 살펴보겠습니다.

.

39,1

요셉은 이집트로 끌려 내려갔다. 파라오의 내신으로 경호대장인 이집트 사람 포티파르가 요셉을 그곳으로 끌고 내려온 이스마엘인들에게서 그를 샀다.


성경은 요셉을 팔아넘긴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형들이 아니라, 미디안인들, 또는 이스마엘인들이라고 분명하게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45,4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나에게 가까이 오십시오.“ 하고서는, 그들이 가까이 오자 다시 말하였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 어떤 일인가요? 정작 이집트에 온, 그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긴 사람이 바로 형들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사건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져 온 그 사건 에 대해서, 성경책은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가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을 우리에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누가 요셉을 팔아넘겼을까요? 이에 대한 답을 요셉이 다시 하고 있습니다.

.

45,5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자 여러분들께서는 어떠십니까? 성경이 우리를 농락하고 있는 이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성경의 저자들은 요셉을 팔아넘긴 사람에 대해서,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본인 요셉의 입을 통해서 나온 이야기는 바로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일이라는 고백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창세기에 대해서 우리가 떠올릴때, 많은 분들은, 그 눈을,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한 이야기에 맞추어 놓고 봅니다. 하지만, 창조 이야기는 3장까지로 끝이 납니다. 이후에 오늘 독서에서 들었던 아브람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야곱과 그의 아들. 12지파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기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살펴본다면, 창세기의 딱 절반인 25장부터 등장하는 야곱의, 이스라엘의 이야기 입니다. 집착과 집념이 가득한 인간에서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의 그 시작을 알려줌과 동시에 화해와 용서라는 큰 주제를 갖고, 창세기의 50장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우리말의 번역인 창세기, 세상을 창조한 기록이라는 이 번역은 이런 의미에서 올바르지 못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기원에 촛점이 맞춰져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기원에 그 촛점이 맞춰져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요셉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그 원조들이 어떠한 잘못을 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으며, 동시에 화해를 해 나가는 과정을 우리에게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직접 팔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원인을 제공하였습니다.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습니다. 요셉 또한 성숙하지 못한 어린 아이였습니다. 형들 앞에서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옷을 입고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야곱이라는 그 집착과 집념 가득한 인간에게서 출생한 다양한 인물들이, 다시 요셉이라는 한 화해의 인간을 통해서, 다시 화해하고 손을 잡게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 그것이 바로 창세기입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그 화해를 드라마틱하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하였지만,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 이해되고 바라볼 수 있게 되는 눈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정관념, 생각들은, 우리의 눈을, 올바르게 보려고 하는 우리의 모든 감각들을 닫아버립니다. 그러한 예가 바로 요셉의 이야기 입니다.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방해가 됩니다. 잘 모르고, 낯선 순간에 우리는 더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하지만, 잘 안다고 방심하는 순간, 우리는 그 중요한 것을 놓치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스스로 성경을 잘 모른다, 성경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다고 솔직한 고백을 합니다. 하지만, 정작 성경을 읽을 때는 ! 그 내용! 그 이야기!“ 하면서, 자만을 하게 됩니다. 물론, 항상 위축되어서 지낼 것도 아니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잘 모른다고 해서, 위축되지도 말고, 잘 안다고 해서, 쉽게 지나치지 말고, 성경 말씀을 읽으실 때, 정확하게 정독을 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첫 번째가 고정 관념, 나의 생각등을 지워버려야 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는 정독입니다. 자세하게 읽는 것입니다. 정독을 하다보면,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성경의 본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이야기가 일관성있고, 논리적인 전개 양상을 띠는 것이 아니라, 모순 가득한 순간을 알려줍니다. 그러니 의문을 가져 보십시오. 그러한 의문은 우리를 거룩한 말씀에 저항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에 더욱 다가가도록 이끌어줍니다. 그리고, 그 의문은 혼자서 묵상하고, 기도하여 보고, 그래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던, 여러분들의 훌륭한 Navigation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2.2.          수난 사화 비교 공관 복음과 요한 복음

또 다른 이야기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좀 양이 방대합니다. 우선,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몇 주 뒤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십자가상의 죽음을 통한 부활을 맞이하게 됩니다. 십자가 상의 죽음. 그 죽음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점인 부활에 이르는 반드시 필요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공관 복음과 요한 복음은 그 사실을 조금은 다르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질문은 예수님께서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언제입니까? 우리식으로 이야기하면, 성금요일입니다. 그렇다면, 금요일인데, 어떻게 우리는 알았을까요? 왜 금요일이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성경, 복음서가 우리에게 금요일이라고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복음서? 바로 네 권의 복음서 모두가 우리에게 금요일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그 사실을 먼저 확인해 보기 전에 여러분들께 한 가지를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혹시, 각각의 복음서가 몇 장으로 구성되어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마태오 28, 마르코 16, 루카 24, 요한 21장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흥미롭게도, 복음서의 마지막 세 장에는, 우리가 성주간, 특히 성목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부활 성야에서 읽게되는 수난 사화가 등장합니다. ! 요한 복음의 마지막 장인 21장은 후대에 붙여진 것으로 보아서, 요한 복음만 18장부터 수난 사화가 시작됩니다.

.

마태

 

마르

 

루카

 

26,2

너희도 알다시피 이틀이 지나면 파스카인데, 그러면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

14,1

파스카와 무교절 이틀 전이었다.

22,1

파스카라고 하는 무교절이 다가왔다.

26,17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4,12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가서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2,7

파스카 양을 잡아야 하는 무교절 날이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이르셨다. „가서 우리가 먹을 파스카 음식을 차려라.“

26,1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14,16

제자들이 떠나 도성 안으로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2,13

제자들이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7,1-2

아침이 되자 모든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기로 결의한 끝에, 그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 총독에게 넘겼다.

15,1

아침이 되자 수석 사제들은 곧바로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 곧 온 최고 의회와 의논한 끝에,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겼다.

22,66

날이 밝자 백성의 원로단, 곧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모여 예수님을 최고 의회로 끌고 가서,

27,45. 50

45: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50: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

15,33. 37

33: 낮 열두 시가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오후 세 시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37: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23,44. 46

44: 낮 열두 시쯤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46: 그리고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요한

 

13,1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

19,14

그날은 파스카 축제 준비일이었고 때는 낮 열두 시쯤이었다.

19,30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조금은 복잡하고 어렵게 여겨지실 수 있습니다. 공관 복음과 요한 복음의 아주 미묘한 차이를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리해서 말씀을 드리면, 공관 복음과 요한 복음 모두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은 금요일입니다. 왜냐하면, 다음 날은 바로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

마르 15,42

 

이미 저녁 때가 되어 있었다. 그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었으므로,

요한 19,31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날은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내용이 앞서 살펴본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공관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파스카 음식을 드시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마지막 만찬입니다 다음날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파스카 음식을 드시지 않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에서는 만찬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오히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 입니다. 공관 복음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저녁 식사는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 그러면서 동시에 파스카 만찬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 복음에서는 파스카 만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날짜 또한 틀리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을 서로 다르게 보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어느 것이 맞는 이야기일까요?

여러분들은 파스카 축제 때 무엇을 먹는다고 알고 있습니까? 탈출 12,5 에서는 파스카 축제의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짐승은 일 년 된 흠 없는 수컷으로 양이나 염소 가운데에서 마련하여라.“ 양이나, 염소입니다. 다시 질문드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까? 신부님께서 성체를 들어올리시면서,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흠도 티도 없는 하느님의 어린양.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공관 복음과 요한 복음을 비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공관 복음과 요한 복음의 시간 개념이 서로 다르다는 문제점을 제기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바로 이 예수님을 파스카 제물인 어린 양으로 보았으며, 그 흠도 티도 없는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복음서의 시간 배열과 구성을 통해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복음서에서 공통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시간입니다. 오후 세 시. 이 시간은 바로 과월절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어린 양을 잡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첫 등장에 대해서, 세례자 요한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

1,29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1,37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 복음의 시작에 바로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증언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어린양의 모습으로 파스카의 희생 제물인 그 어린양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음을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요한 복음 전체에 걸쳐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는 마태오 복음 1장을 펴 보십시오. 1 23절 입니다.

.

1,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바로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는 마태오 복음의 제일 마지막 절을 보시게 되면, 더욱 분명하여 집니다.


28,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이제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다고 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나타내고 표현하고자 했던 예수님, 그 분은 바로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그것에 대한 다음 대답은, 성경을 부분적으로만 읽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체를 통해서 볼 때,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Kontext를 이야기합니다. Kontext를 알지 못하고, 지엽적인 일부분만 읽게 된다면, 올바른 내용을 알 수 없게 됩니다. 여러분들께서 매일미사 책을 통해서 읽게 되시는 그 날의 독서와 화답송, 복음 내용 만으로는 성경을 올바로 읽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러한 예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것을 모두 다 열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단편적인 면만을 갖고 읽는다고 하면, 성경책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약간 지루하고, 어렵게 여겨지실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올바른 눈을 갖는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읽고자 하는 이유는 다른 그 무엇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 안에, 예수님 안에 머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신앙을 위해서 그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내용을 많이 알고 있다고 그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주지 않습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주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맞춰서 살아가는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뜻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바로, 성경책에서 찾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잘못된 시선은 잘못된 해석으로 이끌게 되고, 잘못된 해석은 생명의 말씀인 성경을 사람들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단죄하는 죽음의 말씀, 심판의 말씀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저는 여러분들께, 세 가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첫째, 성경을 읽을 때, 고정관념을 버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책에 본문의 위에, 굵은 글씨로 소제목이 붙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읽고, 내용을 추측하고, 정독보다는 제목에 따라서, 우리의 눈을 고정시키게 됩니다. 그렇게 생겨난 고정관념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더욱 다가가는데에 방해 요소로 작용합니다.

둘째는 이러한 이유로 정독을 하시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에서 살펴본 것처럼, 정독을 하였을 때에만, 본문의 내용을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성경을 읽으실 때, 지엽적으로만 보시지 말아야 함을 말씀드립니다. 전체에서 부분으로 읽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부분이 전체를 구성하긴 하지만, 일부분만 놓고 본다면,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바를 올바로 읽어내기가 참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2.3.          나오는 말

오늘의 이야기들은 조금 어렵게 다가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경을 우리의 근원을 밝혀주는 텍스트라고 칭하면서, 정작 그것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경에 숨겨진 참된 보물을 발견할 수 없게 됩니다. 저는 지난 시간, 강론을 시작하면서, 여러분들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주인공이시고, 이 무대의 주연은 여러분들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성경을 읽어야, 그 가치를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고작 두 시간 남짓한 시간으로 성경의 가치에 대해서, 여러분들께 모두 전할 수는 없었다는 사실도 고백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우리의 자세입니다. 지금껏 성경이 우리의 삶의 자리를 채워가는 삶의 원천으로 삼지 못하였지만, 앞으로 읽고, 묵상한다면, 주님의 생명력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주님의 성령 안에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가 이 두 시간동안 지루하고 재미없게도 여겨질 수 있는 이 시간을 보낸 것은, 여러분들께 성경에 대한 전문인이 되시라는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생명력있는 주님의 말씀을 여러분께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이 지상 여정의 길을 걷고 있음에 등불이요,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살아가는데 안내서가 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함께 이 시간을 나누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토라, 주님의 가르침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말씀을 읽고, 낭독하며, 주님의 말씀을 삶의 지표로 삼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총 3권의 책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모세오경, 예언서 그리고 시서와 지혜서입니다. 여기서 모세오경을 히브리말로, 토라 (hrwt), 이는 다시 주님의 가르침으로 번역이 됩니다. 예언서의 첫 시작인 여호1,8에 이렇게 나왔습니다. „이 율법서 (토라)의 말슴이 네 입에서 떠나지 않도록 그것을 밤낮으로 되외어, 거기에 쓰인 것을 모두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네 길이 번창하고 네가 성공할 것이다.“ 시서와 지혜서의 첫 시작인 시편 1,1-2에는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 (토라) 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성경 전체에 걸쳐서 주님의 가르침, 토라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디 우리 신자 여러분들께서,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 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어, 주님의 사랑 받는 자녀요, 참된 행복에 이르시기를 바라고, 항상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