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신앙 강연회  : 사순절과 신앙 II

사순 제4주일 [가해], 2011 4 3

[1독서: 1사무 16,1/6~7/10~13/ 2독서: 에페 5,8~14 / 복 음: 요한 9,1~41 (소경의 치유)]

 

찬미 예수님,

지난 겨울 성탄을 앞두고 했던 대림 특강 때, 제가 대림 제3주일 강론을 하면서, 로마전례 주기에 따르면 1년에 2번 기쁨주일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대림4주간 중에서 3번째, 대림 제3주일이고 또 다른 하루는 사순5주간 중에서 4번째, 사순 제4주일 이라는 말씀을 드린 기억이 나는데, 오늘이 바로 금년 들어 맞이하는 두 번째 기쁨 주일, 사순 제4주일입니다.

전례개혁 이전에는 기쁨주일에 사제들은 기쁨의 상징으로 장미색 제의를 입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장미주일 이라고도 했는데, 요즈음은 이런 전통이 많이 사라졌지만 이어져 내려오는 기도문을 통해서 기쁨 주일의 전통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미사 입당송에 보면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 (이사 66,10-11) 라고 하면서 기뻐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 기간 중에 기쁨주일이 들어 있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보속과 속죄를 통해서 예수님의 수난을 기념하며 동참하는 사순시기 한 가운데에 있는 사순 제4주일을 기쁨주일이라고 하면 약간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당신은 몇 살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으면, 자기가 살아온 햇수를 말하면 됩니다.

그런데 만약 누가 [당신은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살 생각 입니까?] 라고 질문을 해 온다면 그 누구도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세상의 모든 권세를 한 손에 거머쥐고 사는 사람도, 죽는 것 만큼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사 중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모든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라는 사실 입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확실한 것은, [어느 누구도 자기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게 될지]를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그러니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있어라. (마르 13,32~33)]라고,  당신도 모른다고 하시면서, 언제라도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길 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든 비 그리스도인이든, 인간의 가장 큰 고뇌, 가장 오래된 고뇌는 [나는 누구 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고 하는 자신의 근원에 대한 문제와, [죽어야 한다는 것], 죽음에 대한 불안함, 그리고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왜 사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살더라도 그것이 단순한 고생, 고난이 아니라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과정이며 십자가라고 믿기 때문에 그 희망이 우리를 살아가게 해 줍니다. 죽음이 영원한 생명의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에, 죽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도 잘 압니다.

 

우리가 대림기간 뿐 아니라 사순 시기에도 기쁨주일을 지낼 수 있는 것은~, 이 같은 삶과 죽음의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초연할 수 있고, 사순 시기도 부활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순 시기는, 예수님께는 수난과 고통의 시간이지만, 우리 인간들에게는 [자신을 희생 제물 삼아서, 우리를 대신해서, 하느님께 용서를 청해 주신] 그분의 희생을 통해서 거져 새 생명이 보장 되는 부활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예수님의 청이 하느님께 받아들여졌음을 인간들이 함께 체험하고 확인하는, 부활을 기다리는 시기이기 때문에, 가장 기쁘고 희망에 차 있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들의 삶이 이렇게 항상 기쁘고 희망에 차 있는가 돌아보면 그렇지 못한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죽은 뒤에,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린다고 하니까, 현세의 어려움과 고통을 참아 보려고 애를 쓰기는 하지만, 어떤 때는 [나중에 산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어도 당장 좀 편해 보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눈앞의 고통이 너무 커서, 벗어 버리고,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싶은], 자포자기 심정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영원한 안식이 죽은 뒤에서야 누릴 수 있는 것이라면, 꼭 이렇게 바둥거리면서 살아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대충 살고 빨리 죽는 것이 옳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만약 이런 생각을 한번이라도 해 보신 분이 있다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닌가 돌아 보아야 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 이것이 인생의 현실이고, 그 삶이 단 한번으로 끝 난다는 것, 바로 그것이 인생을 [영원한 가치]를 위해 살아야 하는 이유라고 예수님은 가르치셨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마태 16,26)]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영원한 가치를,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으로 완성되는 것,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과 일치되는 상태인 [천국]이라고 가르쳐 주시면서, 이것을 인생의 궁극 목표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당신 가르침 대로 살기만 하면, 그 천국은 당신께서 마련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다. (요한 11,25)],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1요한 14,2)] 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사형선고를 받고, 예수님 십자가 오른쪽에 매달려 있던 강도가 [당신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자, 예수님께서는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루카 23,42~43)]라고 하시면서 그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처럼,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가, [영원한 생명]으로 완성 되는 것, 그렇게 되어서 [하느님과 영원히 일치하는 상태가 되는 것], 그것을 천국이라고 한다면, 현세의 우리들 삶 안에서도 우리는 이미 그 천국의 안식과 평안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천국이, 우리가 바라는 하느님과의 일치가 현세에서 이미 시작 되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국이란 것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죽은 뒤에나 누리게 될 평화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죽은 뒤에나 갈 수 있는 천국을 믿는 것이 아니라, 현세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고 그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천국은, 하느님의 평화는 정말로 우리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이 천국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도 아셨기 때문에, (요한 5, 24),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들어섰다].

그리고 요한 사도도 (1요한 3,2)에서 천국을,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천국이 어떤 모습일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뵙겠기 때문입니다] 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께서도, [천국은,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행복]이라고 표현 하셨습니다.

 

하지만, 천국은, 하느님의 평화는, 정말로 우리 인간의 지성만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름대로 [천국]을 생각할 때, 우리가 [가족이나 친구 또는 이웃과 서로 깊이 마음이 통하고 일치되었을 때 느끼는 행복], [자기를 희생해서 이웃의 목숨을 살리는 어떤 사람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음속에 솟구치는 뜨거운 감동] 또는 [고백성사를 마치고 고해소에서 나올 때의 그 홀가분함과 평안함],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피정이나 기도 중에 체험하는 하느님과의 황홀한 일치], 그런 행복과 평안함, 뜨거운 감동과 황홀한 일치가 영원히 지속되는 상태, 그런 상태가 천국일 것이라고 상상해 봅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 오르는, 그 상태가 바로 천국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이 이런 천국을, 체험하고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너무나 쉬운 방법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해 드리려고 애쓰지 말고, 그분께 해 드리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우리 이웃에게 해주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하늘이 내 어좌요, 땅이 나의 발판이거늘, 이 모든 것을 내 손이 만들었고, 이 모든 것이, 내 것 이거늘, 너희가 무엇을 나에게 바치겠다는 말이냐? (이사 66,1~2)]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 25,40), 이 보잘 것 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나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42)]라고 하시면서, 인간들끼리 서로 봉사하고, 인간들 끼리 서로 받들면, [서로 사랑하면] 천국에 이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혹시 성경에서 기도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를 읽어 보신적이 있습니까?  레지오 활동 열심히 해야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는 말씀을 보신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꾸르실료 교육받고 성령기도회 열심히 하면, 아니면 성경 지식을 많이 쌓으면 천국에 들어 간다는 얘기를 읽어 보신적이 있습니까?

이런 모든 신심행위나 공부는, 이웃을 제대로 섬기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나는 이웃을 제대로 섬기고 있는지? 돌아보고 반성해서,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한 방법일 뿐이지, 그 자체는 천국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 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합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를 드리는 것 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 보다 낫습니다.(1사무 15,22)]라고 성경에도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하느님 말씀은 어떤 말씀입니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한 분이신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신명 6,5),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라(레위 19,18)]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말씀을 잘 듣고, 명심하는 것 만도, 번제물과 희생을 바치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면,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기 까지 한다면 그 상급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렇다고, 기도하지 말고, 신심단체 활동 하지 마시라는 얘기가 절대 아닙니다 !

기도와 신심활동을 하는 근본 이유가 무엇인지,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하느님을 찾으려고 헤매지 말고,

눈에 보이는 이웃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쉬운 길을 알려 주셨는데도, 우리들에게는 이것이 또 그렇게 어렵습니다.

이웃을 섬기는 방법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 으로 설명해 주시고, 당신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셨는데도, 우리는 자주 잊어버리고 우리 방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빛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고, 우리가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더 깊이, 그리고 올바른 방향으로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시고, 또한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 되어 주라고 가르치시는데, 당시의 제자들과 주변 사람들의 태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정말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날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던 제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 한 사람을 봅니다.  그 소경을 보고 제자들은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도와줄 수 있을까?  혹시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 라는 질문을 합니다

이것이 소경을 본 제자들의 첫 반응이었고, 제자들이 그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 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우리의 반응이고, 우리의 시각인지도 모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들은 어떤 현상을 보면, 그 결과가 누구의 탓인지 묻는 데 익숙해 있습니다.   어떤 한계에 부딪치거나, 위기에 처하고 불행한 일에 직면 하게 되면, 우리들은 먼저 뒤-, 과거를 돌아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무엇이 잘못 되었지?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예수님께서는 이 같은 과거를 향한 시각을 거부하시고, 미래를 바라보십니다.    [이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과거의 무엇 때문에 가 아니라, 앞으로 그것을 통해 무언가가 일어나기 위해서다] , [그를 통해서,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우리를 살게 하신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9,3)]라고 하셨습니다.  결과 처럼 보이는 어떤 사람의 불행이나 그 사람의 약점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와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보고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눈먼 소경이, [전에 길가에 앉아서 거지 노릇을 하던 사람]이라는 사실만 기억했지, 그의 눈이 밝아져서, 구걸하던 신분을 벗어난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방식대로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 소경을, 그리고 나아가 예수님까지도 단죄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당시 주변사람들이 보인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을 우리들을 생각 하면서,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짙은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지금, 말 그대로, 글자 그대로, 빛을 보게 되었고, 그래서 이제부터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삶을 만끽하도록 치유되고 해방 되었는데, 이 은총을 가까이에서 지켜 본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함께 기뻐해 주고 축제를 벌여 주지는 못할 망정, 온갖 불만과 시기, 옹색하고 악의에 찬 비판과 의혹을 내 뱉으면서, [이 사람이 그 사람 맞아?  당신 어떻게 보게 되었어?  예수란 사람,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해도 되는 거야?] 라는 의문과 문제를 제기합니다.

드디어 볼 수 있게 된 그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세상 사람들의

이 같은 모습을 보고, 얼마나 낯설고 멀게 느껴졌을까?  차라리 눈을 뜨지 말 것을

하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도 바로 이런 외로움을 십자가 위에서 느끼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비추어 주시는 빛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 자신의 생각을 빛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빛으로 인정할 수 없었고, 소경을 죄인으로 낙인 찍어서 공동체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진짜 소경은 어둠의 세력에 빠져 있던,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믿습니까? 그럼에도 지금 []는 누군가를 단죄하고 있습니까?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내가 누군가를 친교의 공동체에서 몰아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는 빛의 하느님이 아닌, 내가 만든 하느님을 믿고 있는 것 일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잠에서 깨어날 때입니다.  어둠에서 빠져 나와야 할 때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겠노라고 약속한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를 만나 뵌 결과 인생에 달라진 점이 과연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 복음의 소경처럼 새로운 시력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보고 듣는 것이 분명 달라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에서, [우리가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으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에페 5,8)]고 일러주십니다.  나아가서,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일에 가담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밖으로드러내는 일에 가담하십시오.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 빛으로 밝혀 집니다. (에페 5,9~14)]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이 무엇인지를 가려 내고, [어둠의 일]에 가담하지 마십시오!

 

[어둠의 일]은 빛을 피해서, 숨어서, 몰래 하는 일입니다. 떳떳하지 못한 일이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런 일은 해서도 안되지만, 이런 일에 가담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빛을 피해서, 숨어서, 몰래 하는 일들은 대부분, [남을 모함하는 일, 공동체를 분열 시키는 일]입니다.  [남을 단죄 하는 일, 누군가를 친교의 공동체에서 몰아 내는 일] 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일과, 주님을 슬프게 하는 일을 가려낼 줄 알아야 합니다.

 

어둠을 극복하는 길,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의지와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날마다 주님께 여쭈어 보아야 합니다.

[겸손된 마음으로 보는 자 주님의 빛을 볼 것이며, 겸허한 마음으로 뜻을 묻는 자  진리의 말씀을 들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극복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길 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시는 예수님을 부끄럽지 않게 맞이 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웃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 이웃을 하느님으로 섬기고 있는지, 특별히

남은 사순 시기 동안 되돌아 보고 반성해야 합니다.

 

주님, 성령의 은총으로 저희 눈을 열어주시어,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 세상의 빛이신 그 분만을 믿고 따르게 하소서.   !!